This is the submitted version of the article: Sangwoo Han. «Finding Imjin War Captives and Returnees in Household Registers of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Taedong munhwa yŏn’gu, Vol. 110 Núm. 110 (Juny 2020), p. 173-200. This version is available at https://ddd.uab.cat/record/239952 under the terms of the license 임진왜란 被擄人과 逃還人들의 흔적을 찾아서* ― 17세기 초 호적으로부터 한상우** * 이 연구는 European Research Council 산하 European Union's Horizon 2020 research and innovation program(No. 758347)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 Universitat Autònoma de Barcelona 박사후연구원 국문초록 임진왜란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끌려갔지만, 그중 돌아온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더 구나 극소수 사족층 피로인들의 체험 기록을 제외하면, 우리는 여전히 누가 일본에 끌려갔으 며 누가 살아 돌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이에 본 연구는 호적에서 발견되는 끌려간 자(被擄人) 들과 도망쳐 온 자(逃還人)들의 기록에 주목하였다. 17세기 초 산음, 단성, 울산의 호적에서 발견되는 141명의 피로 기록과 17명의 도환인들의 성별, 연령, 직역 등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호적상 피로인들은 대부분 노비로 20세를 전후한 나이에 잡혀간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도망쳐 돌아온 도환인들은 20대 후반에 피랍된 양인 남성이 다수임을 확인하였다. 또 도환인들은 호적 작성 직전에 배우자를 찾고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호를 구성하여, 정부 차원에서의 정착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제어 : 임진왜란, 피로인, 도환인, 호적, 피로, 쇄환 Ⅰ. 머리말 1592부터 1598년까지 벌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은 한반도에 큰 상처를 안겼다. 전 쟁 기간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전쟁과 기아, 질병 등으로 사망하면서 조선은 유래 없는 인구 충격을 겪었다. 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납치되어 갔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 지는 가늠조차 쉽지 않다. 조선 정부는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일명 “被擄人”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 기간 중 발생한 피로인 수는 정확 히 알 수 없으며 학자에 따라서도 그 추산치가 차이를 보이나1) 학계에서는 약 10만 명 내 외의 조선인들이 납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2) 일본으로 끌려간 많은 조선 피로인들은 일본의 사회, 문화 뿐 아니라3) 세계 경제에도 영 향을 주었다.4) 특히 조선인 도공들이 일본 도자 문화 발달에 끼친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 끌려갔던 피로인 중 沙器匠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기도 하면서 관련 연구가 진행 되었으며,5) 그 외에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에 남은 피로인들의 삶이 조명되기도 했 다.6) 일부 사족층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돌아와 남긴 작품을 통해 피로인들이 누구인지, 그 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7) 하지만 피로인 중 사족층이 아니었던 대다수의 피로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측의 자료를 통해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역시 부족하다. 전쟁이 끝난 뒤 6년 뒤인 1604년, 惟政이 일본에 방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3천 명의 피로인들을 데려온 것을 시작으로, 조 선 정부는 본격적으로 피로인 쇄환을 시도하였다. 그 일환으로 1607, 1617, 1624년 피로인 쇄환을 목적으로 쇄환사가 파견되어 피로인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다.8) 이 과정에 참여 했던 쇄환사들의 기록을 통해 연구자들은 당시 피로인과 쇄환인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 다.9) 그러나 역시 소수의 양반층 쇄환인들을 제외하면 돌아온 자들이 누구였는지, 귀환 후 1) 적게는 2~3만 명 정도에서(内藤雋輔, 『文禄·慶長役における被虜人の研究』, 東京大学出版会, 1976), 많게는 40만 명까지(崔豪鈞, 「壬辰·丁酉倭亂期 人命 被害에 대한 계량적 연구」, 『國史館論叢』 89, 2000) 그 추산치가 다양하다. 2) 민덕기, 「임진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壬辰亂硏究叢書: 壬辰亂7周甲紀念』, 壬辰亂精神文化 宣揚會, 2013, 296~297면. 3) 하우봉, 「임란 직후 조선 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4) Lúcio De Sousa, The Portuguese Slave Trade in Early Modern Japan - Merchants, Jesuits and Japanese, Chinese, and Korean Slaves, Studies in Global Slavery Volume 7, Brill 2018. 5) 李美淑, 「日本 九州地域의 朝鮮 被虜沙器匠 硏究」,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이미숙, 「조선사 기장 李參平의 피납과정과 활동에 관한 연구」, 『인문과학연구』 26, 인문과학연구소, 2010; Maske, Andrew L. Potters and Patrons in Edo Period Japan: Takatori Ware and the Kuroda Domain. New York, Ashgate Publishing, Ltd. 2011; 이미숙, 「16세기 被虜沙器匠의 출신지 연 구」, 『인문과학연구』 33, 인문과학연구소, 2012. 6) 민덕기,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 왜 납치되었고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와 담론』 36, 호서사학회, 2003; 민덕기, 「임진왜란기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잔류 배경과 그들의 정체성 인 식」, 『한국사연구』 140, 한국사연구회, 2008. 7) 蘇在英, 「壬亂被虜들의 해외체험 – 금계일기, 간양록, 해상일록을 중심으로」, 『겨레어문학』 9·10, 동 아인문학회, 1985; 김기삼, 「壬亂時 被虜 文人의 體驗的 文學의 考察 : 『看羊錄』과 『月峯海上錄』을 중심으로」, 『韓國漢文學硏究』 21, 韓國漢文學硏究會, 1998; 방기철, 「『月峯海上錄』을 통해 본 鄭希 得의 일본 인식」, 『韓國思想과 文化』 47,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유채연, 「임진왜란기 피로인들과 그들의 기록 - 강항·정희득·노인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33, 인문과학연구소, 2012. 8) 양흥숙, 「17세기 전반 회답겸쇄환사의 파견과 경제적 의미」, 『향도부산』 21,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손승철, 「조선통신사의 피로인 쇄환과 그 한계」, 『전북사학』 42, 전북사학회, 2013; 이훈, 「임 란 이후 ‘회답겸쇄환사'로 본 대일본외교 전략 - 선조대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49, 한일관계 사학회, 2014; 김문자, 「임진왜란 이후 朝·日간의 국내사정과 통신사 파견 - 回答兼刷還使 파견을 중 심으로」, 『향도부산』 29,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19.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본 연구에서 확인한, 자발적으로 도망 쳐 돌아온 자, 즉 도환인들은 지금까지 학술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자들과 돌아온 자들에 대한 연구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 는 바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글을 남길 수 있었던 사족 층에 비해 대부분의 비사족층 피로인과 도환인, 쇄환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남길 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없었다. 이들을 역사 속에서 불러오기 위해 본 연구에서 주목한 자료는 바로 조선의 호적대장이다. 호적은 사족층 뿐 아니라 천민까지 전 계층의 호를 기록 하였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진 자료이기 때문이다.10) 이에 본 연구는 17세기 초 편찬된 호적들에서 발견되는 피로인들과 이중 다시 한반도로 도망쳐 돌아온 자들의 기록을 찾아 분 석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의 역사 연구에서 포착할 수 없었던 임진왜란 당시 잡혀 간 자들과 돌아온 자들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잡혀간 자들: 被擄人 1. 호적과 피로인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고, 또 일부 돌아온 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시 대 호적대장을 활용하였다. 호적대장은 조선 정부가 부세 수취 등의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 로, 개인의 성명과 가족 관계, 연령, 직업(직역), 변동사항 등 다양한 정보들을 기재하였다. 조선 정부는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도록 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호적은 일부에 불과하며, 피로인들과 도망쳐 온 자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17세기 초의 호적은 극히 소 수이다.11) 이에 본 연구는 현전하는 가장 앞선 시기의 호적대장 1606년에 편찬된 산음과 단 성, 1609년 울산, 그리고 1630년 산음의 호적을 이용하였다.12) 특히 산음과 단성의 호적은 책 단위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대장이다. 이 중 1606년 단성 호적은 같은 해 산음현의 호적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으로 단성이 큰 피해 를 입어 1599년 산음현에 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13년 단성이 다시 현으로 복구되 었기 때문에, 현전하는 1630년 산음 호적에는 단성 지역 호들의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성 호적은 1606년뿐 아니라 1678년 호적이 남아 있으며, 1717년 이후로는 19세기 후반까 지 이르는 방대한 양의 호적대장이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호적 중 가장 먼저 전산화가 진 행되었다.13) 울산 지역의 호적은 1609년의 것부터 남아 있다. 울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장 마 지막까지 점령하고 있던 지역 중 하나로 1609년 호적은 그들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지 불과 9) 김문자, 「16~17세기 韓日 관계에 있어서의 被虜人 귀환 - 특히 여성의 경우」, 『祥明史學』 8, 상명사 학회, 2003; 황현우, 「對日 使行錄과 被虜人記錄에 나타난 被虜體驗」,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구지현, 「壬辰倭亂 被虜人에 대한 回答兼刷還使의 인식 변화」, 『동악어문학』 63, 동악어문학 회, 2014. 10) 전산화를 거치며 정리된 호적대장의 특징에 대해서는, 호적대장 연구팀, 『단성 호적대장 연구』, 成均 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3을 참고하라. 11) 현전하는 호적에 대해서는 손병규, 『호적』 , 휴머니스트, 2007, 51~52면 참조. 12) 1630년 산음 호적은 전쟁이 끝난 뒤 30년넘게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지만, 쇄환사가 1624년에도 파 견되었으며, 1606년 산음 호적과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어 연구대상에 포함하였다. 13) 산음 및 단성호적대장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전산화된 단성호적대장은 성균관대 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웹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s://ddmh.skku.edu/ 10년 뒤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또 울산 호적은 1609년과 1672년부 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잘 남아 있어 전산화가 진행되었으며, 현재 19세기 초까지의 데이터가 공개되어 있다.14) 산음과 단성, 울산의 호적에서 확인된 피로인은 모두 141명이다.15) 1606년 산 음에서는 35명, 1606년 단성에서는 32명, 1609년 울산에서는 28명, 그리고 1630년 산음 호적에는 46명의 피로인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1630년 산음 호적에 기록 된 피로인 7명은 1606년 호적에서부터 기록된 자들이다. 1630년 호적에서 이들의 정보는 1606년 호적의 기록으로부터 나이만 24세씩 많아졌을 뿐 큰 차이가 없어, 호적 내 피로인 기록이 연속적이고 믿을 만한 자료임을 말해준다. 또 피로인들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피랍되었다가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자들의 정보는 피로인 관련 분석에서는 이용하지 않고, 다음 장에서 따로 분석하였다. 1606년 산음 호적의 피로인 기록, 그림 1에서 보듯이 17세기 초 산음, 단성, 울 산의 호적은 일반적으로 개인 정보 뒤에 “被擄”라 기록하여 이들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에게 포로가 되었음을 표현하였다.16) 여러 명의 피로인들을 기록할 때는 “等被擄”라 기록하였다. 일부 “被擄婢”, 또는 “被擄奴”처럼 직역과 함께 피로 정보가 기록된 경우도 보이는데, 이 역시 포로가 된 노비를 기록한 정 보로 보인다. 또 일부 포로들의 경우, “丁酉年被擄” 등으로 포로가 된 시점을 명시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被擄加現”이나 “被擄節現” 등의 표현이 확인 되는 데, 이는 피로인의 정보가 호적이 작성된 해당 식년에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호적의 피로인 기록 중에서는 흥미로운 정보들이 있다. 1606년 단성 北洞里에 <그림 1> 거주하던 陳氏 여인은 자신의 비인 九月에 대해 “被擄逃亡”이라 호적에 보고하였다. 이는 진씨가 자신의 비인 구월이 “붙잡혔거나 도망하였다”고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자구만으 로는 “붙잡혔다가 도망하였다”고 해석될 수도 있으나, 만약 구월이 도망하여 돌아왔다면 호적에 등장하였어야 하기 때문에 도망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이해하기는 어렵다. 1609년 울산 凡西里의 李夢希는 자신의 비인 古進이 “被擄日本”하였다고 호적에 보고하 였다. 이는 본 연구에서 확인한 호적에서 잡혀간 자들이 끌려간 곳이 ‘일본’임을 직접 언 급한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는 당시 호적이 투항한 일본군을 “降倭”라고 부르면서도, 지 명이나 장소로는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음을 말해준다.17) 2. 잡혀간 자들은 누구인가 본격적으로 호적에 기록된 피로인들의 정보를 분석해보자. 중복되어 기재된 7명을 제외한 134명의 피로인들을 성별에 따라 구분하면 <표 1>과 같다. 남성 피로인은 50명으로 전체 피 14) 1609년 울산호적대장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전산화된 울산 호적은 규장 각 홈페이지에서 검색 및 다운로드 가능하다. http://kyujanggak.snu.ac.kr/ 15) 호적 속 피로인들의 구체적인 정보는 <부표 1>을 참고하라. 16) 현재 학계에서는 “被虜人”이라는 용어로 이들을 가리키고 있으나, 호적에서는 “被虜”라는 표현이 확 인되지 않는다. 그 외에 피로인들을 의미하는 “俘虜”, “俘人” 등의 용어도 보이지 않았다. 17) 임진왜란 당시의 피로인들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본 연구에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1630년 산음 호적에는 “胡被擄”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산음이 호란의 전쟁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표시된 피로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피로인들은 왜란 중 포로가 된 자들로 가정하고 분석을 진행하였다. 로인의 37.3%을 차지하며, 여성은 72명으로 53.7%, 그리고 성별을 확인할 수 없는 피로인들 은 12명으로 9%에 달했다. 이처럼 전체적으로는 포로가 되었다고 보고된 자들 중에는 여성 이 더 많다. 하지만 1630년 산음 호적의 여성 피로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뿐, 1606년 산음과 단성, 1609년 울산 호적에서는 피로인들의 성비가 큰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임진왜 란 당시 실제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포로가 되었다고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겠 다. <표 1> 시기, 성별 및 지역별 따른 호적 속 피로인 수 (단위: 명) 1606 산음,단성 1609 울산 1630 산음 계 남 29 11 15 (5) 55 (5) 녀 31 14 29 (2) 74 (2) 불명 7 3 2 12 계 67 28 46 (7) 141 (7) 출전: 1606 산음 및 단성 호적, 1609년 울산 호적, 1630년 산음 호적 (이하 표, 그림 동일). 비고: 괄호 안의 수는 1606년 호적에 이미 기록되었던 피로인의 수. 호적에 기록된 피로인들의 주호와의 관계, 즉 호내위상은 어떠했을까. <표 2>를 보면 주 호 본인이 피랍된 경우는 3차례였으며, 납치되었다고 보고된 가족 구성원들은 처, 처모, 前 妻子, 異姓四寸妹 각 1명씩이었다. 1606년 산음의 戶長이었던 宋禮男은 자친이 처인 朴召史 가 丁酉년에 포로가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1609년 울산 靑良里의 出身訓鍊僉正인 李贊白은 포로가 된 이성 사촌 누이 阿只의 정보를 보고하였다. 주호이면서 피랍된 경우 중 두 번의 사례는 사망한 이전 주호를 대신하여 자동으로 주호 자리를 승계한 자들로, 실제 호적상 주 호이면서 피로인인 경우는 1606년 산음 月音洞에 거주하던 貴年의 사례뿐이다. <표 2> 호적 속 피로인의 호내위상 (단위: 명) 호내위상 주호 처 妻母 異姓사촌妹 前妻子 노비 불명 인원 3 1 1 1 1 116 11 1630년 산음 호적에서 보이는 피로인 주호 孟秋의 경우를 살펴보면, 전쟁 후 호구파악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이 호는 1606년 호적에서도 발견되는데, 여러 정보를 종합해보면 이 호의 원래 주호는 前奉事 吳國龍이었으며, 그는 처와 아들, 그리고 나중에 주호 자리를 이어받는 婢 맹추가 구성원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代戶 정보(이전 주호의 有故로 인 해 주호 자리를 넘겨받은 새 주호에게 기재되는 정보)를 통해 1606년 당시 주호였던 오국룡 은 이미 사망하고, 처인 文氏가 주호를 맡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1630년 주호이자 피로인으로 등장했던 맹추는 1606년 호적에는 도망하였다고 보고되었다. 하지만 1630년 호 적은 이 호의 주호가 피로인 맹추이며, 吳國龍, 그의 처 文氏, 그리고 아들인 武學 吳夢參이 모두 사망하였다는 대호 정보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원래 주호였던 오국룡의 사망, 이후 문씨와 아들인 몽삼의 사망으로 인해, 주호 자리가 형식상 이미 도망한 것으로 알려진 비 맹추에게까지 내려왔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제 맹추는 이 호의 주호였던 적이 없었 으나 호적의 형식에 따라 주호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18) 한편, 1606년 도망하였다고 기 록된 맹추가 1630년에는 피랍되었다고 수정된 것으로 보아 도망 노비들이 실제로는 피랍되 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표 3>을 통해 피로인들의 직역을 살펴보자. 134명의 피로인 중 124명, 사망한 주인의 주호 자리를 이어받은 두 번의 경우를 포함하면 전체 피로 정보의 88.1%는 가족 구 성원이 아니라 주호 가족이 소유한 노비들의 기록으로부터 확인된다. 이러한 특징은 피로인 들을 호내위상, 즉 주호와의 관계가 아니라 호적상 직역에 따라 구분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 다. 전체 피로인의 94.8%인 127명의 직역이 노비였기 때문이다. 호적상 134명의 피로인 중 양반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양반이었던 이찬백의 피랍된 사촌 누이 단 하나뿐이다.19) 향리층, 중층으로 분류 가능한 경우 역시 앞에서 설명한 송예남의 처, 박 조이의 사례 정도에 불과하다. <표 3> 호적 속 피로인의 성별과 계층 (단위: 명) 남 녀 불명 계 士族 1 1 군역자 1 1 賤人 49 70 8 127 불명 1 4 5 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일본군이 노비만을 납치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일본에 건너갔던 쇄환사들이 직접 만난 사족 출신 피로인들에 대한 기록도 상 당하다.20) 더구나 직역이 노비인 자들 중에서도 호적에 주호의 가족으로 등록된 자들은 거 의 피랍되지 않고, 호내위상이 노비인 자들만 피랍되었을 리는 없다. 따라서 오히려 이러한 현상은 호적의 특징, 그리고 호적상 피로인 기록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호적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부세 수취를 위한 목적으로 기록한 장부였다. 따라서 포로가 된 노비를 둔 주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피해를 보고하고 세금 부담을 경감받기 위해 포로 가 된 노비들의 정보를 호적에 실었으리라 생각된다. 아울러 노비 주인들은 피랍된 된 노비 가 돌아오더라도 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들을 지속적으로 호적에 올렸을 가 능성도 있다. 다음으로 피로인들이 피랍된 된 시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호적은 피로자들이 납치 된 시점을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표 4>에서처럼 17세기 초 산음, 단성, 울산의 호적에서 납 치 시점이 확인되는 피로인은 모두 11명이다. 이들이 납치된 시점은 전쟁이 끝난 해인 전쟁 이 시작된 1592년부터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인 1597년에 걸쳐 있었다. 이는 전쟁의 마지막 18) 호적이 부세를 위한 장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부세를 감당할 수 없는 피로인을 주호로 배치한 상황 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이해는 추후 산음 호적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이해될 필 요가 있겠다. 19) 이찬백과 그의 처계의 사조직역을 보면 安逸戶長이 등장하여 이들의 양반층으로의 위상이 의심스러 운 정황이 있으나, 처 朴氏의 이름 근거하여 상층으로 신분을 확정하였다. 李俊九, 「婦女子의 號稱 問題」, 『朝鮮後期身分職役變動硏究』, 一潮閣, 1993; 김경란, 「조선후기 호적대장의 여성호칭 규정과 성격 : 『단성호적』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48, 한국역사연구회, 2003 참조. 20) 피로인이었던 鄭希得은 “士族被擄者甚多”라고 증언하였다. 鄭希得, 『海上錄』 제1권 8월 5일. 해인 1598년에는 이미 일본군이 수세에 몰려 조선인들을 납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일반적으로 1597년 정유재란 이후 다수의 포로가 잡혀간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21) <표 4> 피로인의 피랍 연도 (단위: 명) 연도 1592 1593 1594 1595 1596 1597 1598 인원 1 2 4 1 2 1 - 한편, 호적은 개인들의 나이 또는 출생 간지를 기록하므로, 이 정보를 활용하면 납치될 당시 피로인의 나이를 분석할 수 있다. 다만 피랍 시점이 확인되지 않는 다수 피로인들의 납치 당시의 연령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피랍 시점 추정이 필요하다. 이에 본 연구는 피랍 시점이 확인되지 않는 자들은 전쟁의 중간 시점인 1595년에 피랍되었다고 가정하였다. 이렇 게 연령이나 출생년 확인이 가능한 122명의 피로인들을 대상으로 피랍 시점을 가정하여 피 랍 연령을 계산하여 나타낸 것이 <표 5>이다. <표 5> 호적 속 피로인의 성별 및 지역별 피랍 연령 평균 (단위: 세) 산음 단성 울산 계 남 18.7 17.3 21.6 19.0 녀 20.5 21.6 22.4 21.1 불명 24.5 19.0 9.5 18.0 계 20.0 19.4 21.0 20.1 피로인들은 적게는 4세에서 많게는 46세의 나이에 납치되었다. 하지만 납치 시점은 10대 초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연령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남녀 모두에서 동일했 다. 이는 일본군이 노동력으로 활용 가치가 높았던 이들, 그리고 가임기의 여성을 선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일본으로 이동시키기가 어려운 영·유아나 50세 이상 노년층은 피랍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실제로 1642년 일본 長崎(나카사키) 平戶町(히라도죠)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조사한 보고 서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피랍된 1세대 조선 피로인은 15명이었는데 그중 10세 전후에 납 치된 자가 12명이었다.22) 또 “아직 자아가 확립되어 있지 않지만, 문자를 알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총명한 소년을 포로로 하여,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의 풍속에 맞춰 키워서 통역관 으로 이용하여 장기전에 대비”23)하기 위해 일본군이 남아를 선호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경향성은 피로 당시 연령의 평균을 확인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 피로 당시 피로인들의 21) 다만 피랍 시점이 기재된 자들이 전체의 약 8%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사용한 호적이 경상도 일 부 지역의 호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피랍 시점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22) 中村質, 「壬辰丁酉倭亂の被虜人の軌跡 - 長崎在住者の場合」, 『韓國史論』 22, 1992(민덕기, 2003 앞의 논문, 180,199면에서 재인용). 23)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中)』, 吉川弘文館, 1969, 145면; 仲尾宏, 『朝鮮通信使と壬辰倭亂』, 明 石書店, 2000, 176면(李美淑, 2008, 앞의 논문, 50~51면에서 재인용). 연령은 평균 20.1세였다. 성별에 따라서는 남성들의 피랍시 연령이 여성들에 비해 약간 낮 은데 이는 모든 지역에서 남성들의 피랍 연령이 여성들보다 낮은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나타 난다. 지역 차이는 크지 않지만, 단성에서 납치된 자들의 평균 연령이 낮고, 울산의 피랍 연 령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림 2> 호적 속 피로인의 피랍 연령 (단위: 세(X축), 명(Y축)) 울산의 인구 규모나 전황 등을 고려할 때, 울산 호적의 피로인 정보는 예상보다 많지 않 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선 울산은 전쟁 초부터 종전 시점까지 장기간 일본군이 주둔한 곳으 로, 일본군은 주둔지 관리를 위해 민간인들의 납치를 상대적으로 적게 하였을 가능성이 있 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지역 간 차이는 호적에 기록된 피로인 정보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으 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즉, 호적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피로인 기록은 노비 주인의 신고에 의해 작성되었으나, 지방 양반층의 세력이 강했던 단성이나 이웃한 산음에 비해 울산은 상 대적으로 양반층이 강하지 않았기에 피로인 보고 역시 적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Ⅲ. 도망쳐 온 자들: 逃還人 1. 刷還과 逃還人 전쟁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 에야스 중심으로 정권이 재편되었고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관계 회복 을 위해 가장 시급한 사안 중 하나는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피로인들을 귀환시키는 것, 즉 刷還이었다. 1603년 일본측에서는 開市와 함께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1604년 惟政과 孫文 彧을 파견하여 일본측의 정세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돌아오며 포로로 끌려갔던 삼천여 명에 달하는 피로인들과 함께 돌아왔다.24)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복원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피로인들의 쇄환을 주목적 으로 외교사절단인 쇄환사가 파견되었다. 呂祐吉이 중심이 된 첫 쇄환사가 1607년 출발했다. 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쓰 를 만나기 위해 에도까지 오가는 동안 많은 조선인 피로인들을 만나고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1,240명25)의 피로인들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후 조선 정부는 1617년과 1624년 두 차례 쇄환사를 보냈으나, 전쟁 후 이미 시간 이 많이 흘렀기 때문인지 각각 321명,26) 146명씩27)을 쇄환하는 데 그쳤다.28) 본 연구에서 집중하고 있는 17세기 호적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납치되었다가 되돌아온 사람들이 확인된다. 1609년 울산 호적에서 16명, 1630년 산음 호적에서 1명이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었다.29) 여기서는 이들이 누구인지, 또 어 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3>의 1609년 울산 도환인 사례에서 보듯이, 호적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가 돌아온 자들을 “被擄逃還”, “被擄走回” 등으로 지칭하였다. 이는 이들이 피랍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호칭에 근거할 때 호 적에 등장하는 돌아온 피로인들은 1607년 이후 공식적인 쇄환사 활동을 통해 돌 아온 자들이라기보다 개별적인 루트를 통해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도망쳐 한반도 로 돌아온 사람들로 보인다. 실록에서도 조선 정부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쳐 온(被擄逃還)” 자들과 惟政 등 “타인에 의해 쇄환된(因人而刷還)” 자들을 구분하였으며,30) 走回人 역시 피랍되었다가 도망쳐 온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 용하였다.31) 내륙의 지리산 기슭에 위치한 산음이나 단성보다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과 마주 보고 있는 울산에서 되돌아온 자들의 대부분이 발견되는 상황 역시 이 들이 쇄환된 자들이 아니라 도망쳐 바다를 건너온 자들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준 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자발적으로 위협을 무릅쓰고 도망쳐 돌아온 이들을 공 식적인 절차에 의해 쇄환된 자들, 즉 쇄환인들과 구분하고, 이들을 호적에서 기 록한 그대로 ‘도환인’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호적이 왜 도망쳐 온 자들에게 굳이 “도환”이라는 표기 <그림 3> 를 부여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호적이 국가의 공적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직역은 부세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필요에 의해 해당 정보가 기록되었 으리라 여겨진다. 예를 들어 울산 3명의 도환인들의 경우, “被擄走回人”이라는 직역 정보 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직역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특별히 역에 대한 언급 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표기 자체가 일종의 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도환인들 이 정착하기까지 일정 기간 復戶와 같은 상태를 유지시켜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당 시 조선 정부의 쇄환인 정착 지원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1603년 비변사는 24) 『宣祖修正實錄』 39권, 38년(1605년) 4월 1일 2번째기사. 25) 『宣祖修正實錄』 41권, 40년(1607년) 8월 1일 1번째기사. 26) 『光海君日記』[중초본] 41권, 9년(1617년) 10월 26일 4번째기사. 27) 『仁祖實錄』 8권, 3년(1625년) 3월 13일 2번째기사. 28) 사료적 한계로 쇄환인들의 정확한 수를 추산은 쉽지 않다. 위의 기사들을 종합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쇄환된 자들은 수는 채 1만 명을 넘지 않는다. 29) 도환인들의 구체적인 정보는 <부표 2>를 참조하라. 30) 『宣祖實錄』 188권, 38년(1605년) 6월 7일 4번째기사. 31) 『宣祖實錄』 56권, 27년(1594년) 10월 10일 8번째기사. 走回人 郭彦祐에게 免役復戶帖을 발급하여 安住를 돕도록 건의하여 宣祖의 허락을 받았 다.32) 또, 1617년 쇄환 당시 예조의 諭告文을 보면, 조선 정부는 1607, 1617년 쇄환한 피로 인들에게 면역, 면천, 복호 등의 혜택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33) 이를 통해 당시 조선 정부가 피로인의 쇄환은 물론 정착에까지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2. 돌아온 자들은 누구인가 호적의 도환인들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단 한 명을 제외한 도환인들 모두가 남성 이라는 점이다. 호적 속 17명의 도환인들 중 여성은 울산 溫陽里에 살던 召史 여인 단 한 명뿐이었다. 호적은 그녀를 “피로도환良女” 기록하였으며, 그녀가 향리인 趙世의 딸이라 는 정보를 남겼다. 앞에서 우리는 호적상 피로 노비들 기록을 통해 성별에 관계 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피랍 되었으며, 오히려 여성의 비중이 조금 더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일본에서 도망쳐 온 자들 중에서는 오히려 남성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이와 같은 상황은 여성들에게 감 시를 뚫고 바다를 건너 도망쳐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겠다.34)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도환인들의 특징은 이들의 신분 구성이다. <표 6>에서 보이듯이, 대부분의 도환인들은 일반 군역자, 즉 常民이었다. 직역 정보를 가진 11명 중에는 甕匠이 가장 많은 5명이었으며, 正兵이 3, 水軍이 2, 양녀와 사노가 1명씩이었다. 나머지 도환인 중 4명은 비록 직역을 알 수 없으나, 호적에 기록된 四祖(부, 조, 증조, 외조)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 역시 대부분 정병, 수군의 직역을 세습하는 가족 배경을 가진 일반 군역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쇄환인들 중에는 양반 출신이 많았다고 알려진 것과는 대비된다.35) <표 6> 호적 속 도환인의 직역 (단위: 명) 직역 甕匠 正兵 水軍 良女 私奴 불명 인원 5 3 2 1 1 5 호적상 피로인이 대부분 노비였던 것과 달리, 살아 돌아온 자들의 대부분이 일반 군역자 들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호적상 노비 피로인이 많은 것이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로인 중 군역자들만 도망쳤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합리 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선 정부의 쇄환자 대상 면천 정책에 기인하였다. 1605년 사헌부는 일부 쇄환된 公私賤이 주인들에게 당하는 고난을 막기 위해 쇄환된 자들 중 천민은 贖良하 여 軍額 감소를 막고 다른 이들을 권면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36) 이처럼 천민 출신 도 환인들은 면천의 혜택을 받아 군역을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도환인들 중 여전히 천민이 자들도 확인된다. 甘世는 직역이 “被擄逃還私奴”인데, 다만 소유주나 이전 거주지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그가 실제로 옛 주인에게 속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32) 『宣祖實錄』 188권, 36년(1605년) 8월 17일 8번째기사. 33)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下)』, 吉川弘文館, 1969, 圖版三. 朝鮮禮曹俘虜刷還諭告文. 34) “도환”이라는 직역이 혜택을 의미했다면, 돌아온 여성들이 자신들의 피로 경험을 숨기기 위해 호적 에 도환인임을 표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적다. 적어도 비사족 여성들에 대해서는 도화인 기록이 없 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35) 민덕기, 앞의 논문, 2006, 131~133면. 이러한 차이의 원인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36) 『宣祖實錄』 188권, 38년(1605년) 6월 7일 4번째기사. 다른 한편으로, 상층에서 도환자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일본군에게 사로잡히는 것 자체를 不忠으로 간주하였기에 도망쳐 돌아와 혜택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도환인임 을 밝히지 않았을 수 있다. 또 이는 도환인들이 자신들 신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발생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호의 도환인들의 四祖(부, 조, 증조, 외조) 정보를 살펴보면, 이들의 가계 정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친의 이름을 기록한 자는 12명, 사조의 이름을 모두 보고한 자들은 7명에 불과했다. 일례로 도환인 尹應春은 자신의 조부가 “학 생”, 즉 양반이라고 보고하면서도 조부의 이름, 부친과 증조의 직역, 그리고 외조 정보를 기록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상층 직역을 얻지 못한 채 다른 일부 군역자들과 동일하게 “被擄走回人”이란 직역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도환인들의 직역 유형을 살펴보면 눈길을 끄는 집단이 존재한다. 그것은 도환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옹장, 즉 옹기 제작자들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옹장들은 전체 도환자의 약 30%에 해당하는 5명에 달했다. 1609년 울산의 호적에는 모두 18명의 옹장이 등장하므로, 도환 옹장들의 비중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장인들을 잡아 올 것을 명령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장인들 이 끌려가 한반도의 문화를 일본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중 한반도의 도자기 기술이 임진왜 란을 계기로 일본에 전래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장인 인구의 유출은 조선 정부에 도 직접적인 부담으로 돌아왔다. 현전하는 승정원일기의 가장 앞부분인 인조 3년 기사 중에 는 沙器의 양을 채우지 못하거나,37) 沙器匠의 수가 부족하다는 보고가 여러 곳에서 확인된 다.38) 司饔院은 사기를 제작하기 위해 入役하는 자들의 수가 줄고 있으며, 10분의 1에 불과 하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39) 따라서 도환인들 중 옹기 장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많은 수의 陶工들이 일본에 끌려갔는지를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결과라 하겠다. 도환인들이 일본인들의 감시를 뚫고 동해를 건너 한반도로 돌아오는 길은 매우 위험하고 고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망이 실패할 경우 치러야 할 대가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피로인들은 누구였을까. 우선 도환인들의 연령이 일반 피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와 동일한 방법으로 도환인들의 피랍 당시 연령을 추측해보면, 이들은 약 28.5세에 피랍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호적에 기록된 피로인들의 피랍 당시의 평균 연령인 추 정치인 20.1세보다 훨씬 높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단성 지역 남성들의 초혼 연령 이 18세, 여성이 17.5세 정도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40) 이들이 피랍 이전에 이미 가정을 꾸렸을 가능성이 높다. 고향에 대한 기억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하도록 자극하는 요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조선인으로의 자의식 형성과도 관련이 있다. 1617년 쇄환사의 종사관으로 5개월 간 일본에 다녀온 李景稷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扶桑錄』은 15세 이상의 나이로 일본으로 잡혀 온 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조선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달리 10세 이전에 잡힌 자들 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서술하였다.41)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피랍된 피로인들은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하였으며, 이 또한 고국으로 돌아가 고자 하는 의도를 약화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42) 37) 『承政院日記』 인조 3년 을축(1625) 2월 14일. 38) 『承政院日記』 인조 3년 을축(1625) 7월 2일; 6년 무진(1628) 10월 14일. 39) 『承政院日記』 인조 3년 을축(1625) 6월 17일. 40) 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 『역사와 현실』 51, 한국역사연구회, 2003, 204~208면. 41) 李景稷, 『扶桑錄』 8월 22일(갑인). <그림 4> 호적 속 피로인과 도환인의 피랍 연령 비율 (단위: 세) 이번에는 한반도로 돌아온 남성 도환인들의 호 구성과 가족들을 살펴보자. 도환인 대부분 은 호적에서 주호로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1609년 울산 호적에 등장하는 金夢은 도환인 남성들 중 주호가 아니며 배우자도 없는 유 일한 도환인이다. 김몽에게는 “無妻鰥夫”이라는 기록이 붙어 있는데, 이는 그가 현재 배 우자가 없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의 사회적 지위를 볼 때, 이후 재혼하였을 가능성이 높 다. 또 그는 호적에서 찾을 수 있는, 피랍되었다가 본래 친족에게 돌아온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43) 호적상 그는 金廷瑞의 처 동래김씨의 조카로 기록되었다. 동래 출신인 김정서는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동래성이 함락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1600년 다대포첨사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1609년 호적 작성 당시 김정서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그 처인 동래김씨가 주호를 이어받았는데, 여기에 도환인 김몽이 확인되는 것이다. 다만 김몽 과 김정서, 김씨의 정확한 관계는 확인되지 않다. 호적상 김몽이 울산김씨인 것과 달리 김 씨의 본관은 동래이며, 김정서는 강릉김씨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김몽의 제외한 모든 도환인은 배우자가 있었다. 타국으로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살아온 도 환인들이 모두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도환인 중에는 이미 나 이가 50세가 넘은 자들이 4명이나 있는데, 이들 모두 배우자를 찾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물 론 이들이 전쟁 전에 헤어졌던 배우자와 다시 만났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으나, 오히려 귀환 이후 배우자를 찾았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러한 추정이 더 합리적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도환인들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도환인들의 평균 연령이 40세가 훌쩍 넘었음에도 호적상 자녀 기록이 없다는 점은 자 42) 민덕기, 앞의 논문, 2004, 122~124면 43) 울산의 도환인 尹應春의 호에는 처와 함께 率同生 玉梅가 있다. 하지만, 응춘이 사족 출신 도환인으 로 자신의 고향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이름 등을 미루어 볼 때, 옥매는 처의 동생 형으로 추정된다. 연스럽지 않다. 만약 이들이 전쟁으로 헤어졌던 배우자를 다시 만난 것이라 하더라도 한결 같이 자녀들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귀환 후 새로운 배우자를 찾았으 며, 대부분 자녀가 없는 것으로 보아 혼인을 한 시점도 호적이 작성된 1609년 직전으로 보 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정착을 돕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표 7> 호적 속 도환인의 호내위상과 호 구성 본인 위상 호 구성원 사례 수 비고 처 12 처, 자 1 주호 처, 동생(처형) 1 처, 자, 사위, (壻)妻 1 1630 산음 姪 주호 1 金廷瑞 妻 金氏의 率姪 처 주호 1 被擄逃還 瓮匠 金今同의 처 17명 중 호적에 자녀들을 등록한 도환인은 단 두 명뿐이다. 울산에서 처와 9세 아들과 함 께 살던 閑千山, 그리고 1630년 산음 호적의 유일한 도환인 “日本逃還正兵” 李古沙只가 바로 자녀를 기록한 자들이다. 이고사지는 주호로 아내 김조이, 아들, 사위와 사위의 처와 함께 호를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고사지가 고성이씨인 것과 달리 아들 毛老는 離山崔씨였으 며 부친을 彦上이라고 따로 기록하였다. 사위인 崔末叱生 다음에는 (사위의) 妻가 있는데, 상식적으로는 사위의 처라면 딸이겠지만, 그녀 역시 부친을 이고사지가 重己라고 기록하였 다. 아들과 딸 모두 도환인 이고사지와는 실제 혈연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이고사지가 언제 한반도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내인 김조이가 두 명의 남성에게서 아들과 딸을 낳 은 1605년 이후 이 가족을 꾸리게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도환인 이고사지의 사정은 전쟁으 로 인한 복잡한 가족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반도로도 돌아온 도환인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쇄환된 피로인들은 原籍 地로 돌려보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쇄환사와 통신사를 통해 쇄환한 1625년의 146명, 1643 년의 14명의 피로인들을 원적지로 돌려보낸 조치들이 실록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44) 하지 만 아쉽게도 姜沆처럼 양반이거나 趙完璧처럼 유명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귀환자들이 고국에 서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반도 로 돌아온 자들의 삶이 평탄치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자발적으로 옛 주인을 찾아 되돌아온 公私賤들이 주인들에 의해 억압된다는 보고가 있었 으며,45) 심지어 전쟁과 포로 시절을 거치면서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일부 쇄환인이 수 령의 수탈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고가 왕에게 들리기도 하였다.46) 조선 정부 는 고향을 찾아 돌아온 이들을 북방 국경 강화를 위해 북방으로 다시 옮길 것으로 의논하기 도 했다.47) 때로는 일본과 내통하고 비밀을 누설할 수 있는 자로 간주하여 이들이 일본으로 의 使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까지 했다.48) 이상의 기록은 쇄환인에 대한 기록이지만, 44) 『仁祖實錄』 8권, 3년(1625년) 3월 13일 2번째기사; 44권, 21년(1643년) 11월 3일 1번째기사. 45) 『宣祖實錄』 188권, 38년(1605년) 6월 7일 4번째기사. 46) 『光海君日記』[중초본, 정초본] 141권, 11년(1619년) 6월 21일 3번째기사. 47) 『宣祖實錄』 165권, 36년(1603년) 8월 24일 1번째기사. 처한 상황은 도환인 역시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1609년 울산에 등록된 도환인들은 원적지가 타지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의 16 명의 도환인들 중 본 친족을 찾아간 김몽을 제외하면, 나머지 도환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 하고 있었다. 도환인 11명은 온양리, 4명은 靑良里에 거주하였는데, 1609년 울산 호적의 총 9개의 리가 가운데 이 두 곳의 리에만 도환자들이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들은 울산에서도 流民, 召募軍, 屯軍, 豆毛岳, 向化人, 降倭 등 외지에서 들어온 자들의 비율이 높은 곳들이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자들의 비율이 높은 지역에 도환인들이 집중적으로 기재되었다는 점은 이들이 원적지가 아닌 특정 지역에 정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1609년 울산 호적의 召募軍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 정부는 피해가 극심했던 울 산 등지에 소모군을 설치하고 전세, 요역 등을 면제하는 등의 혜택을 주어 전쟁을 피해를 복구시키려 하였다.49) 따라서 외지에서 온 소모군들이 다수 정착한 이 지역에 도환인들 역 시 정착하였는 점, 그리고 모두 배우자를 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자녀가 없다는 점 에서, 이들의 정착이 정부의 주도, 또는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유일한 도환인 부부, 金今同 부부의 사례를 살펴보자. 33세의 被擄逃還瓮匠 김금동은 그는 42세인 처와 함께 1609년 울산에서 하나의 호를 구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본 관을 “忠淸道 連山”이라 보고하였는데, 이는 일반적인 성관의 기재 양식이 아니다. 1985 년 국세조사에서도 連山金氏는 그 인구가 342명에 불과한 희성이라는 점으로 보아 이 기록 은 그의 본관이 아니라 고향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금동의 아내 召史 역시 도환인으로 “被擄逃還良女”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본관을 함안으로, 부친 이 향리인 趙世라고 보고하였지만, 1609년 울산 호적에는 또 다른 함안조씨가 확인되지 않 는다. 따라서 그녀 역시 울산이 아니라 타지역의 함안조씨 향리 가문 출신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김금동과 그의 처 조조이는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한반도로 도망쳐 와 원적지가 아 닌 울산에 정착하였다. 이는 쇄환인들이 원적지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50) 조조이의 나이가 40대이면서도 자녀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뒤로 이웃 한 호에 등재된 다른 도환자들과 함께 당시 많은 외지인들이 들어온 남면 온양리에 정착했 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부의 지원 위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09년 울산 호적 이후 가장 가까운 호적은 1672년의 것이고, 다수의 도환인들이 정착한 온양은 1684년 호적에서야 등장하기 때문에 도환인들과 그 후손들이 이후 어떻게 살아남았 는지는 확인이 어렵다.51) 다만 1609년 377개에 불과했던 울산 온양의 호가 1684년 호적에는 1000개로 늘어나 울산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면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Ⅳ. 맺음말 임진왜란 중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그리고 다시 한반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들이 48) 『光海君日記』[중초본] 39권, 9년(1617년) 4월 11일 2번째기사. 49) 다만 소모군의 70%는 도환인들이 있는 남면이 아닌 동면에 정착하였다. 울산 호적의 소모군에 관해 서는 다음 연구 참고. 송수환, 「왜란 직후의 울산 소모군 - 1609년 울산부호적대장을 중심으로」, 『역 사와 경계』 96, 부산경남사학회, 2015. 50) 이런 의미에서도 본 연구에서 확인한 도환인들은 쇄환인들과 구분될 필요가 있다. 51) 산음 호적 역시 1630년의 것이 가장 나중의 것이기에 이후의 변화상 추적이 불가능하다. 얼마인지, 그리고 이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본 연구는 현전하 는 17세기 초에 편찬된 호적대장에서(1606 산음과 단성, 1609 울산, 1630 산음) 일본으로 끌 려간 피로인들, 그리고 일본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도환인들을 찾아보고 그들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호적상 피로인의 호내위상과 직역은 대부분 노비였다. 이러한 현상은 노비들만 납치되었 기 때문이 아니라 노비들의 납치 사실만이 보고 되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소유주들이 자 신의 노비가 피랍되었음을 신고하는 과정에서 호적상 피로인들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호적 의 연령 기록을 이용하여 피로인들이 피랍되었을 당시의 연령을 추산하면, 평균 20.1세, 그 중 남성들은 19세, 여성들은 21.1세의 어린 나이에 피랍된 것을 알 수 있다. 호적에서는“被擄逃還” 또는 “被擄走回”한 자들, 즉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 돌아 온 자들도 확인된다.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남성인 이 도환인들이 피랍되었을 당시의 연령 을 계산해보면 28.5세로 피로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다. 도환인들 중 직역이나 신분을 알 수 있는 자들은 사노 1인을 제외하면 모두 군역자였으며, 그중 옹기장이(甕匠)가 5명이 되어 많은 장인들이 피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 울산의 도환인들은 대부분 군역 자로 배우자가 있으면서도 자녀가 없고,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는 점, 그리고 원적지가 아닌 곳에 정착하였다는 점 등을 종합할 때, 이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당 지 역에 정착하고 가정을 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 호적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 다. 정부 차원에서 피로인들을 지원하였으리라는 이러한 추측은, 쇄환한 피로인들에게 면천, 면역, 복호등의 혜택을 내린 기록과도 합치한다. 4종의 호적대장을 살폈음에도, 찾을 수 있었던 피로인은 141(중복 기재된 7명 포함)명, 도 환인은 17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끌려간 자들이 누구이며, 돌아온 자들은 어떤 삶 을 살았는지 알려주는 자료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 연구에서 발견한 피로인과 도환인 들의 정보는 큰 가치를 가진다. 또 본 연구에서 피로인과 도환인들이 다른 자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없는 하층민들이었다는 점에서 호적대장의 자료적 장점이 부각된다. 본 연구에서 활용한 호적 이외에도 현전하는 일부 17세기 호적 속 전쟁의 흔적을 찾는 노력이 더 시도될 필요가 있겠다. 참고문헌 1. 자료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宣祖三十九年丙午山陰帳籍』 『光海一年己酉蔚山戶籍大帳』 『仁祖八年庚午山陰帳籍』 李景稷, 『扶桑錄』 鄭希得, 『海上錄』 2. 단행본 손병규, 『호적 -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7 호적대장 연구팀, 『단성 호적대장 연구』,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3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中,下)』, 吉川弘文館, 1969 内藤雋輔, 『文禄·慶長役における被虜人の研究』, 東京大学出版会, 1976 Lúcio De Sousa, The Portuguese Slave Trade in Early Modern Japan - Merchants, Jesuits and Japanese, Chinese, and Korean Slaves, Studies in Global Slavery Volume 7, Brill, 2018. Maske, Andrew L. Potters and Patrons in Edo Period Japan: Takatori Ware and the Kuroda Domain. New York, Ashgate Publishing, Ltd., 2011. 3. 연구 논문 구지현, 「壬辰倭亂 被虜人에 대한 回答兼刷還使의 인식 변화」, 『동악어문학』 63, 동악 어문학회, 2014 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 『역사와 현실』 51, 한국역사연구회, 2003 김경란, 「조선후기 호적대장의 여성호칭 규정과 성격 : 『단성호적』을 중심으로」, 『역 사와 현실』 48, 한국역사연구회, 2003 김기삼, 「壬亂時 被虜 文人의 體驗的 文學의 考察 : 『看羊錄』과 『月峯海上錄』을 중 심으로」, 『韓國漢文學硏究』 21, 韓國漢文學硏究會, 1998 김문자, 「16~17세기 韓日 관계에 있어서의 被虜人 귀환 - 특히 여성의 경우」, 『祥明史 學』 8, 상명사학회, 2003 김문자, 「임진왜란 이후 朝·日간의 국내사정과 통신사 파견 - 回答兼刷還使 파견을 중 심으로」, 『향도부산』 29,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19 민덕기,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 왜 납치되었고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와 담론』 36, 호서사학회, 2003 민덕기, 「임진왜란기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잔류 배경과 그들의 정체성 인식」, 『한국 사연구』 140, 한국사연구회, 2008 민덕기, 「임진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壬辰亂硏究叢書: 壬辰亂7周甲紀念』, 서울,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 2013 방기철, 「『月峯海上錄』을 통해 본 鄭希得의 일본 인식」, 『韓國思想과 文化』 47, 한 국사상문화학회, 2009 蘇在英, 「壬亂被虜들의 해외체험 – 금계일기, 간양록, 해상일록을 중심으로」, 『겨레어 문학』 9·10, 동아인문학회, 1985 송수환, 「왜란 직후의 울산 소모군 - 1609년 울산부호적대장을 중심으로」, 『역사와 경 계』 96, 부산경남사학회, 2015 손승철, 「조선통신사의 피로인 쇄환과 그 한계」, 『전북사학』 42, 전북사학회, 2013 양흥숙, 「17세기 전반 회답겸쇄환사의 파견과 경제적 의미」, 『향도부산』 21, 부산광역 시사편찬위원회, 2005 유채연, 「임진왜란기 피로인들과 그들의 기록 - 강항·정희득·노인을 중심으로」, 『인 문과학연구』 33, 인문과학연구소, 2012 李美淑, 「日本 九州地域의 朝鮮 被虜沙器匠 硏究」,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이미숙, 「조선사기장 李參平의 피납과정과 활동에 관한 연구」, 『인문과학연구』 26, 인 문과학연구소, 2010 이미숙, 「16세기 被虜沙器匠의 출신지 연구」, 『인문과학연구』 33, 인문과학연구소, 2012 이훈, 「임란 이후 ‘회답겸쇄환사'로 본 대일본외교 전략 - 선조대를 중심으로」, 『한일 관계사연구』 49, 한일관계사학회, 2014 崔豪鈞, 「壬辰·丁酉倭亂期 人命 被害에 대한 계량적 연구」, 『國史館論叢』 89, 국사편 찬위원회, 2000 하우봉, 「임란 직후 조선 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 화사, 2005 황현우, 「對日 使行錄과 被虜人記錄에 나타난 被虜體驗」,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부표 1> 호적 속 피로인들 호내 호내 식년 순번 직역 성명 연령 출입기록 식년 순번 직역 명 연령 출입기록 위상 위상 1 노비 奴 種同 24 被擄 36 노비 婢 論伊 23 被擄 2 노비 奴 溫石 24 被擄 37 주호 婢 守今 34 被擄 3 노비 奴 允生 28 被擄 38 노비 婢 X致 33 被擄 4 노비 奴 貴孫 43 被擄 39 노비 婢 九月 52 被擄逃亡 5 노비 貴年 29 被擄 40 노비 奴 䪪未 24 被擄 6 노비 買得奴 順福 42 被擄 41 노비 奴 古文 27 被擄 7 노비 婢 銀伊 43 被擄 42 노비 奴 小斤同 39 被擄 8 노비 奴 唜沙里 20 被擄 43 처 婢 丁應德 43 被擄 9 노비 奴 檢千 27 被擄 44 노비 婢 孫今 26 被擄 10 노비 婢 文月 36 被擄 45 노비 奴 福只 23 被擄 11 노비 朴召史 丁酉年被擄 46 노비 奴 破回 27 被擄 12 노비 奴 X云 45 被擄 47 노비 奴 卜良 30 被擄 13 노비 婢 唜今 21 被擄 48 노비 婢 竹每 49 被擄 14 노비 奴 杜山 19 被擄 49 노비 奴 厚代 28 被擄 15 노비 婢 敦伊 30 被擄 50 노비 婢 億代 35 被擄 16 노비 婢 古應伊 50 被擄 51 주호 奴 戌歲 33 被擄 17 노비 奴 唜從 47 等被擄 52 노비 婢 愛春 25 被擄 1606 1606 18 노비 婢 甘德 33 被擄 53 노비 婢 山梅 40 被擄 산음 단성 19 婢 貫伊 57 被擄 54 노비 X XX 19 被擄 20 노비 婢 玉代 33 被擄 55 노비 婢 老春 15 被擄 21 노비 婢 一花 21 被擄 56 노비 婢 莫卜 22 被擄 22 노비 婢 毛ㄱ今 38 被擄 57 노비 婢 旕介 27 被擄 23 노비 奴 種同 28 等被擄 58 노비 婢 杏花 XX 被擄 24 노비 婢 彭月 24 被擄 59 노비 奴 世連 27 被擄 25 노비 婢 允今 30 被擄 60 노비 奴 貴生 22 被擄 26 奴 文希 19 等被擄 61 노비 X XX XX 被擄 27 奴 內生 被擄 62 노비 X XX XX 被擄 28 노비 婢 延龍 被擄 63 노비 奴 彦卜 25 被擄 29 婢 唜梅 41 被擄 64 노비 X 一花 25 被擄 30 노비 奴 成年 33 被擄 65 노비 奴 彦孫 34 被擄 31 奴 唜世 27 被擄 66 노비 X XX 47 被擄 32 奴 億福 17 被擄 67 노비 X XX 29 被擄 33 노비 婢 順介 48 被擄 34 노비 奴 太山 21 被擄 35 노비 婢 食器 36 被擄 호내 호내 식년 순번 직역 명 연령 출입기록 식년 순번 직역 명 연령 출입기록 위상 위상 68 노비 被擄婢 汗之 48 96 전처자 婢 壬生 52 被擄 이성 69 阿只 被擄 97 노비 奴 二信 42 被擄 사촌매 70 노비 奴 今守 37 被擄 98 노비 婢 山伊 53 被擄 71 노비 婢 每邑德 45 被擄 99 노비 XX 春年 53 等被擄 72 노비 奴 彦忠 25 等癸巳年被擄 100 婢 XX 被擄 73 노비 買得婢 金伊今 48 同年被擄 101 노비 婢 山春 49 等被擄 74 노비 被擄婢 挨代 18 102 노비 XX X連 51 被擄 75 노비 被擄率 故文石 103 婢 XX 66 被擄 76 노비 被擄奴 春金 37 104 노비 奴 玉盃 51 被擄 走叱 77 노비 婢 代加 36 被擄 105 노비 婢 被擄 沙里 78 노비 奴 萬同 33 被擄 106 노비 婢 於代 64 被擄 79 노비 婢 銀代 32 被擄 107 노비 奴 福今 39 被擄 80 노비 買得奴 內隱福 38 被擄 108 노비 婢 億福 73 被擄 81 노비 奴 末伊同 30 被擄節現 109 노비 婢 進代 64 被擄 82 노비 婢 春非 52 甲午年被攎 110 노비 婢 乞花 70 被擄 83 노비 婢 玉班 28 甲午年被攎 111 노비 婢 福德 41 被擄 84 水玉 26 甲午年被攎 112 노비 婢 進伊 57 被擄 等4口 85 金班 23 113 노비 奴 鶴春 59 被擄 甲午年被攎 1609 86 노비 奴 金伊石 49 壬辰年被攎 1630 114 노비 婢 彦從 77 被擄 울산 산음 87 노비 奴 獻必 47 乙未年被擄 115 노비 貴代 48 被擄加現 同生 88 노비 鶴文 37 丙申年被擄 116 婢 XX 49 等被擄 買得奴 89 노비 奴 五音同 26 丙申被擄節現 117 노비 婢 愛春 54 被擄 90 노비 婢 古進 29 被擄日本 118 주호 婢 孟秋 55 被擄 91 노비 被擄婢 昆德 119 노비 婢 千德 58 被擄 92 노비 婢 難代 38 被擄 120 노비 奴 玉從 58 被擄 93 노비 被擄奴 分山 121 노비 婢 彦金 54 被擄 94 노비 婢 小粉代 38 被擄 122 노비 奴 彦玉 51 被擄 95 노비 婢 芿叱今 31 等被擄 123 노비 婢 末叱卜 44 被擄 124 노비 婢 福老 45 被擄 125 노비 婢 莫介 47 被擄 126 노비 奴 文代 57 被擄 127 노비 婢 石只 53 被擄 128 처모 婢 末叱代 43 被擄 129 노비 婢 延梅 64 被擄 130 노비 婢 延介 59 被擄 131 노비 婢 延花 54 等被擄 132 노비 婢 難春 58 被擄 133 노비 奴 永春 41 被擄 134 노비 目ㄱ同 40 被擄 <부표 2> 호적 속 도환인들 식년 순번 호내위상 직역 성 명 연령 출입기록 호 구성원 1 주호 流民被擄逃還瓮匠 閑千山 47 처, 자 2 주호 流民被擄逃還瓮匠 金 巨石 65 처 3 주호 被擄逃還正兵 李 千良 45 처 4 주호 被擄逃還 金 明孫 36 처 5 주호 被擄走回人 金 千金 35 처 6 주호 被擄走回人 金 春元 39 처 7 주호 被擄走回人 尹 應春 30 처, (처)동생 8 주호 流民被擄走回水軍 金 文乙文 63 처 1609 울산 9 주호 被擄走回流民水軍 李 景信 24 처 10 주호 流民被擄逃還正兵 朴 克成 54 처 11 주호 被擄逃還瓮匠 姜 山 46 처 12 주호 被擄逃還私奴 甘世 43 처 13 주호 被擄逃還瓮匠 金 今同 33 처 14 처 被擄逃還良女 召史 42 주호 15 주호 被擄逃還瓮匠 金 內隱必 36 처 被擄逃還 16 솔질 金 夢 47 주호, 노비 無妻鰥夫以居生 1630 처, 자, 女壻, 17 주호 李 古沙只 59 加現日本逃還 산음 (여서)처 영문초록 Finding Imjin War Captives and Returnees in Household Registers of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Sangwoo Han (Universitat Autònoma de Barcelona, Postdoctoral researcher) Korean scholarship on the Imjin War estimates that approximately one hundred thousand Koreans were captured and taken to Japan during the six year conflict (1592-1598), and only a few of them returned to Chosŏn Korea. For the most part, we do not know who these captives and returnees were because, with the exception of a few upper class returnees, most did not leave their name to history. To rectify this, this study pays attention to the household registers of Korea, which contain not only members of the upper class but also the lower classes. I found 141 captives and 17 returnees within the registers compiled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in Sanŭm, Tansŏng, and Ulsan counties. My study illuminates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se captives: most were of lower social status, and their average age when captured was around 20-years-old. I analysed the features of the households of these returnees, and discovered that they did not have children in the household. It means that they married and settled just before compiling the household register of 1609. This study also suggests that most returnees received government support, such as exemptions from taxation, corvee labor, and low born status. These concessions helped them to start a family and to settle down in a specific district, things which the local government concerned wished to encourage. Kyewords: Imjin War, Japanese Invasions of Korea, war captive, returnee, household register